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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우리는 이제 ‘통역’ 없이 되겠죠?

 

한국에 사는 다양한 국적의 외국인 남자들이 우리말로 토론하는 종편 프로그램이 있다. 내용을 떠나서 서로 다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영어가 아닌 한국말로 서로 자유롭게 대화하는 모습이 신기하고 경이롭다. 이들이 나누는 대화가 사형제도나 동거문화 등에 대한 입장을 밝히고 토론하는 것이라 더욱 그렇다.

우리가 연초 목표를 영어공부로 잡거나 영어를 잘하고 싶다고 바라는 것도 다른 모국어를 쓰는 사람들과 대화하고 싶은 욕구가 누구나에게 있기 때문이다. 통역 없이 세상 모든 사람들과 대화할 수 있는 세상을 우리는 꿈꾼다.

오죽하면 성경에도 하나님이 인간에 대한 벌로 하나였던 언어를 혼란하게 하여 서로 소통하지 못하게 만들었다고 나올까. 구약성서의 창세기에는 바벨탑에 관한 짧고도 매우 극적인 일화가 실려 있다. 높고 거대한 탑을 쌓아 하늘에 닿으려 했던 인간들의 오만한 행동에 분노한 신들은 본래 하나였던 언어를 여럿으로 분리하는 저주를 내렸다는 것이다.

그러나 같은 말을 쓴다고 해서 다 말이 통하는건 아니다.

얼마전 문재인 새정치민주연합 대표와 홍준표 경남도지사가 경상남도의 무상급식 중단 논란과 관련해 만났지만 둘의 평가는 벽을 보고 말하는 것 같았다라고 했다. 분명 같은 나라 말을 썼을 텐데 전혀 대화가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끔은 같은 말로 대화했는데 말투를 문제 삼는 경우도 있다. 내용이 문제가 아니라 말투가 문제라고 한다. 반면 아무리 부드러운 말투로 이야기하더라도 눈치가 너무 없거나 대화내용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 상태로 내뱉는 말도 상대방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소위 말하는 운동권들도 그래왔던 것은 아닐까. 운동권 용어(?)라 할 수 있는 승리적 관점으로 보자면, 사회는 계속 진보하고 있다. 그러나 가끔은, 아니 자주, 세상이 별로 변하지 않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아직도 여자아이는 무조건 예쁜게 좋고, 명절엔 시댁부터 가야 하고, 아이는 엄마가 키워야 하고, 청소노동자가 최저임금만 받는 것도 어쩔 수 없고, 일자리에는 엄연한 상하질서가 있고 등등등.

운동권은 그동안 노동, 여성, 환경, 평화 등등과 관련해 나타나는 문제들이 단지 몇몇만의 문제가 아니라 우리 모두에게 바람직하지 않기 때문에 이러저러하게 변화해야 한다고 길에서 캠페인하고 온라인에서 주장하고 정책들을 만들어왔다.

그런데 우리가, 한국여성노동자회가 하는 이야기들에 여성들은 공감이 됐을까? 노동자들이 우리가 하는 주장들에 동의했을까? 시민들을 향해 외친다고 생각했지만, 우리도 우리말을 알아듣는 사람들과 우리끼리만 말하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한국여성노동자회는 지난해 이런 고민속에서 대중들과 소통의 계기를 만들 수 있는 소책자 하나를 만들었다. [친구야 괜찮아? 울컥]이란 책자다. 이 책에는 정책분석이나 제도요구 같은 내용들은 모두 빠져있다. 같이 고민하고 싶은 주제들을 나누고 싶은 욕심을 갖고 만든 책이다. 몇몇 여성주의 학자들과 여성단체에선 좋은 책자가 나왔다며 다들 좋은 평가를 해줬다. 그러나 이 책이 소통하려고 한 대상은 우리 주변이 아니었기 때문에 여전히 이 책에 대한 반응이 궁금했다.

한국여성노동자회는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이 책자에 대한 평가 인터뷰를 진행하는 것을 올해 사업계획으로 잡고 있다. 첫 인터뷰를 진행했더니 정말 우리 주변과는 판이한 반응이 나왔다.

남자들이 보면, 여자책이잖아~ 그런 느낌이 들 것이다.”
관심 없는 여성들이 보면 이해하기 힘들 것이다. 내 친구들은 공감할 수 있을까 의문이다.”
모성이데올로기, 유리천장지수, 학력효과가 무력화된다는 것 등이 무슨 뜻인지 모르겠다. 친절하지가 않다.”
상황을 얘기하고 강요하듯이 얘기한다.”
일은 나의 문제, 노동은 너의 문제라는 제목 자체가 이해가 잘 안된다. 함축의 의미를 알겠으나 쉽게 와닿으면 좋겠다.”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는 단어가 조건의 평등은 아닌 것 같은 느낌이다. 똑같이 8시간 일하고 동일한 임금을 받는 개념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그 깊은 조건의 평등을 얘기하지 않고 단순히 동일노동 동일임금이라고 하면 시간에 따른 금액으로만 생각할 것 같다.”
논리비약이 심하다. 역지사지하라고 충고하고 끝난다.”

정말 우리는 그동안 통역이 필요했나 보다. 이 인터뷰를 계속 진행하면서 기분 좋은 설렘과 떨림이 있다. 그동안 뭐가 문제인지 잘 몰랐다가 이제야 통역이 필요했다는 것을 확실하게 알게 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우리의 올해 목표는 통역 없이 이 책이 읽힐 수 있도록 이 책의 수정판을 내는 것이다.

그동안 이렇게까지 날것의 평가를 받아본 적이 있을까 싶다. 근데 그것보다 더 걱정은 이 수많은 들을 다 주워담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하지만 새로운 내용과 말들도 사람들 속에서 찾아낼 것이다. 이 곳도 그런 새로움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이 되길 바란다.